<개미에 관한 시 모음> 이진숙의 '개미를 위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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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에 관한 시 모음> 이진숙의 '개미를 위하여' 외
+ 개미를 위하여
보도블록 갈라진 틈새로
개미들이 어디 이사라도 하는지,
그들을 방해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피하다 보니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오오,
세상을 바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라고?
(이진숙·시인, 1972-)
+ 개미
태양을 지고
나뭇잎 만한 그늘 지나는 일
끝 모를 여로
한 걸음이 이토록
먼 길인지
낯가리는 내게
세상은 너무 넓어서
평생 햇빛 모르는
구멍 속 내 집인 것을
사랑을 위한 집념
허리 휘어 물고 오는
노동 멈추지 않고
가슴으로
하늘도 감출 수 있는
사랑,
사랑아
(장미숙·시인, 1957-)
+ 개미
지리산 피아골 입구
노을을 받아 빛나는 섬진강 모래톱
강물의 沿革으로 살고 있는
개미 한 마리
굽은 등 위에
산 한 자락 져 나른다
너와 나를 지나
세상 안과 밖을 돌아
올려다보면 너무도 큰 험산 준령
내려다보면 너무도 깊은 골짜기
지고 가는 것은 무엇이든
마침내 거대한 산이 된다
(이창수·시인)
+ 개미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좁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 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건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강연호·시인, 1962-)
+ 나팔꽃과 개미
나팔꽃 속을 들여다보니 그 속
개미 서너 마리가 들어 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너희들에게 나팔을 불게 하시니
나팔꽃은 천천히 하늘로 기어오르고
그 하루하루의 푸른 넝쿨줄기,
개미의 걸음을 따라가면
나팔꽃의 환한 목젖
그 너머
개미는 어깨에 저보다 큰 나팔을 둘러메고
둥둥, 하늘 북소리를 따라
입안 가득 채운 입김을 꽃 속에 불어넣으니
아, 이 아침은 온통 강림하는
보랏빛 나팔소리와 함께
(고영민·시인, 1968-)
+ 개미
개미는
시작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일을 한다
개미는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이다
개미는
허리가 가늘다
아름답다
별도로 다이어트가
필요치 않다
하늘은
일하는 생명에겐
건강과 아름다움을
주노라고 했다
개미는
이 세상 어디에도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도
그는 거기서
일하고 있다
개미는 저주받지 않는다
영원한 축복이 있으리라
(황금찬·시인, 1918-)
+ 개미
멈추지 않는
삶의 현장을 본다.
땡볕에 검게 탄
역군들을 본다.
산 같이 쌓아 놓은
저 거대한 土城
미물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미력한가.
허물어지면
제방을 쌓고
무너지면 제방을 쌓고,
지구의 한 모퉁이
개미는
삶을 포기한 한 주검을 찢고 있다.
그 어리석은 죽음
그 미력한 주검을
개미들이 물어뜯고 있다.
(박덕중·시인, 전남 무안 출생)
+ 개미 한 마리
개미
한 마리
또박또박 간다
(기어가는 건지
걸어가는 건지)
영하 수십 도의
안데스 설원
한 마리
개미
또박또박 간다
(눈 속에 묻혔다가
다시 헤쳐나왔다가)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설원을
벗어난 개미
한 마리
또박또박 간다
(삶이 아름다운 건지
희망이 목숨인 건지)
(허형만·시인, 1945-)
+ 여왕개미
몸은 좁쌀만 해도
꿈은 원대했다
끊어질 듯 가는 허리는
떨어지는 꽃잎에 묶어놓고
사내들 세상을 지배하려
비단 날개는
날카로운 이빨로 끊어 버렸다
힘들었던 과거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구차한 미래가 두려워
이팝나무 고목 등걸에
아담한 보금자리 틀고
유성이 되어 떨어지는 별똥별에
날아가는 꿈 매달고
긴 안테나를 뽑아
우주에 전파를 보낸다
단 하나의 가벼운 좌우명을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가겠노라고
(김정호·시인)
+ 개미는 시동을 끄지 않는다
빵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개미
개미 가는 길을 신발로 가로막지 마라
끓어질 듯 가는 허리에 손가락을 얹지 마라
죽을 때까지 시동을 끄지 않는
개미 한 마리가 손등으로 오른다
언젠가 허리띠를 졸라매던 아버지
바짝 마른 허기가 만져질 것이다
아버지가 털털거리는 생선 트럭을 끌고
돌무지 비탈길을 누비고 다녔다
생선 상자 위로 쏟아지는 땡볕
신경질적으로 바퀴를 두드리는 돌덩이들
왕왕거리는 메가폰 소리를 뚫으며
식식거리며 아버지는 나아가고 있었다
거친 시동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괜찮아, 내 허리띠를 붙잡아라
그날도 아버지는 덜컹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손등에 오른 개미를 가만히 내려놓는 당신
개미 앞길에 놓인 돌멩이를 치워준다
멀어져 가는 아버지,
당신의 눈 속으로 기어든 개미가
시동을 건다 여섯 개의 다리가 붕붕거린다
(정경미·시인)
+ 개미의 바느질
개미가 많은 집에 살았네
장판과 벽 사이
문턱과 바닥 사이
일렬로 늘어선 개미 행렬은
어머니 바늘을 뒤따르는 실처럼
개미 개미 개미 개미 --------
벌어진 사이를 꿰맸네
아껴야 잘 사는 것이여,
날마다 허리를 졸라매던 그녀도
한 마리 붉은 개미
그래도 허기를 벌리는 입은
쉽게 봉할 수 없었네
날마다 늘어나는 틈새를
독하게 기워내는 바늘,
녹슬 틈 없던 그녀의 믿음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졌을 그 집에서
나 그녀로부터
바람 하나 들지 않는
옷 한 벌 얻어 입고 살았네
(길상호·시인, 1973-)
+ 개미 탑
몸집 작은 개미들이
제 모습 돋보이려
너른 대지 속을 파고들어가
땅의 허물을 하나하나 물어다가
높이 굴뚝을 세우니
개미 탑이라더라
제 잘난 것 하나 없어
아무것이나 물고 뜯어 높이 쌓고
보아라 보아라 외치며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귀한 양 뽐내더라
하루는 개미탑 앞에
제 말만 하는 아저씨와
남의 말은 하나 듣지 않는
아줌마가 있더니
또 하루는 돼나가나 지껄이는 이와
아무 말에나 상처입고
남을 미워하며 눈물짓는 여인이 있더라
아마도 개미는
사람들이 튀긴 침과 눈물을 발라
높이 더 높이
굴뚝 같은 탑을 쌓는지도 모르겠더라
(최범영·시인, 1958-)
+ 개미
돌담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까맣고 좁은 통로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통로 속에 두근거리며 매달려 있을
흙내 물씬한 방들을 생각한다
햇볕 쨍쨍 작렬하는 일터에서
땀에 절어 몸이 새까맣게 타버린 개미
허리가 부러질세라 휘어도 어쩔 수 없이
금방 죽은 개미도 떠메고 간다
사인은 무엇일까 사망진단서엔 분명
일하다가 쓰러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
"나는 괜찮다." 손사래 치며 일터로 나가신
아버지가 "업무과로"로 누워 있을 게다
한 뼘의 여유도 숨 돌릴 틈도 없는 삶들의
저 슬퍼할 틈도 없는 절실한 몰두
더듬이를 다듬으며 입술을 꼭꼭 깨문다
(문근영·시인)
+ 개미 이야기
날씨가 추워지자
작은 개미들이 방으로
몰려들어 왔다.
이리저리 기어다니다가
한 떼의 개미가
노트 속으로 기어들어 와
한 편의 시(詩)가 되고.
검게 쓴 글씨가
일렬로 줄지어 서서
개미 뒤를 따라가더니
시(詩)를 이끌고
노트 밖으로 기어나간다.
방바닥에 온통
개미처럼 기어다니는
詩,詩,詩.
가족들이 쪼그리고 앉아
시(詩)를 읽는다.
(양수창· 목사 시인)
+ 개미집은 詩다
시 붙잡고
끙끙대고 있는데
뭐가 움직인다
신경 쓰여 돋보기를 끼고 보니 개미다
제 몸보다 몇 십 배 큰 과자부스러기를
짊어진 건지 미는 건지
끙- 끙-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
순간, 아팠던가
신경이 개미집 가는 미로처럼 느껴졌던가
갑자기 쿵! 소리가 난다
개미가 짐을 부리며 하는 말
- 어쩔라고, 이 양반 오늘도 공쳤군
가슴이 뜨끔한데
새끼들이 식탁에 둘러앉으며
마악 웃는 중이다
참 아득한 풍경이었다
그 詩의 집
(이성이·시인)
+ 개미나라
개미나라는 땅속에 있었네 누가 엿볼까
표식도 없는 미로 속에 있었네
한해살이 삶마저 망가져버린 베짱이의 여름동산
한눈 팔 줄 모르는 개미나라는 봉건적이면서 민주적인
이기적이면서 현실적인 햐, 살맛 나는 별천지네
여왕은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았고
국민은 여왕에게 저항하지 않았네
언제나 개미끼리 오순도순 사는 나라 그 누구의
망명이나 이민도 받아주지 않는 나라
나라 밖 땅위에서 일을 하지만
모든 수확을 땅속으로 물고 가는
저 끈질긴 개미들의 노동을 보라
비록 모두가 가는허리지만 언제나 배가 부른
문지방 너머 흙벽 틈새 또는
마당가 담장 아래 개미나라를
오늘도 병정개미들은 촉수를 세워 파수를 보고
정말 개미나라는 땅속에 숨어 있었네
(한승필·시인)
+ 개미·1
집채만한 우박이 떨어집니다
떠내려가는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다행히 강 저쪽에서
손을 내미는 이가 있습니다
가랑잎이었습니다
간신히 둑에 올라 젖은 몸을 말렸습니다
또 한차례 폭우가 쏟아집니다
나는 가랑잎과 함께 숲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랑잎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습니다
첫눈이 내리자
가랑잎은 포근한 이불이 되어주었습니다
해마다 그 자리에 가면
가랑잎 한 장 달랑 덮고
손을 내미는 이가 많습니다
(박정원·시인, 1954-)
+ 개미와 꿀병
부주의하게 살짝 열어둔 꿀병에
까맣게 들앉았네 개미떼들
어디서 이렇게 몰려들었을까
아카시아 단꽃내가 부르는
저 새까만 킬링필드
꿀에 빠진 개미떼를
몸에 좋다고
뚝, 떠먹는
저 오랜 숟가락들
꿀병에 꽂힌 숟가락을
靑春의 가는 손가락에 쥐어주는
저 시린 입술
(정끝별·시인, 1964-)
+ 개미의 반란
설거지를 하다가
싱크대에 서성이는 개미를 발견했다
황당한 사건에 놀라
꼼꼼히 추적을 해보지만
미궁 속에 빠진 개미,
빠른 손놀림에 생과 사를 넘나든다
은밀한 살생에 희열을 느끼며
완전범죄를 꿈꾸지만
날이 갈수록 병력을 이끌고
나의 공간에 나타난 개미는
음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펼친다
드디어 개미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다니는 길목을 차단하고
살상 무기를 이용하여
몇 일만에 개미의 반란을 잠재웠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죄명은
화약약품 과다 사용,
무차별 과잉 진압이었다
(김경숙·시인, 전남 해남 출생)
+ 개미에게
너의 노트엔 너의 백지엔 너의 원고지엔
너의 책엔 너의 시집엔 너의 논문엔
너의 평론엔 불안이 없다 그림자도 없다
너의 시엔 바람소리도 없다 너의 노트엔
증오도 없다 상처로 얼룩진 밤들도 없다
스산한 저녁이면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는 개미여 네가 속삭이는 말을
나는 들을 수 없다 무식한 무식한 무식한
인간인 나를, 치사한 인간인 나를, 아는 게
없는 선생인 나를 좀 도와다오
(이승훈·시인, 1942-)
+ 개미처럼 베짱이처럼
동네 걱정하고 살자니
나 살기 바빠서 못하겠고
세상 걱정하고 살자니
속이 뒤틀려서 못하겠고
어제도 오늘도 이래저래 바쁘니
인생고 해결에 하루해가 짧은데
쥐꼬리만한 한달 월급
자고 나면 천정 부지 아파트값
가슴만 동동거리다
밤마다 내려앉는 허무
고급 승용차에 골프 회원권이면
저 하늘에 별이라도 딸 줄 알았는데
옆집 떼부자 할아버지
통장마다 보험마다 노후대책 화려해도
힘없는 다리에 지팡이만도 못한 배추이파리
아들 며느리 의리만 상하더라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여보시오.
구름 같은 인생 나그네들이시여
베짱이처럼 노래도 할 줄 아시구려
머리에 이고
등에 진 짐 잠시 내려놓고
지나는 바람에 땀이라도 거두시구려
내 걱정만 하지 말고
동네 걱정
세상 걱정 좀 하고 사시구려
(이채·시인)
+ 코끼리와 개미의 우화
보라!
에베레스트와 K2
몽블랑과 킬리만자로
다 내 발 아래 있도다
부지런히 꼭대기에 깃발을 꽂는다
목이 터지게 만세! 만세! 만세! 외쳐댄다
코끼리는
등에 올라탄 개미가
환호작약 만세 소리 지르는 것쯤이야
언제나 관대하다
(고명·시인, 전남 광주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