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관한 시 모음> 구광렬의 '생일날 아침'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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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에 관한 시 모음> 구광렬의 '생일날 아침' 외
+ 생일날 아침
원죄가 따로 없구나
못난 놈 낳으시고 어머니께서 드신 미역 값은 하는지
나만 믿고 졸졸 따르는 병아리 같은 자식놈들께 자신 없고
당신 없으면 못 산다는 속고 사는 아내에게,
모두에게 죄 짓고 사니
생일날 아침엔 왠지 쑥스럽고 미안하다
입 속에 십히는 미역 한 줄기에도 쑥스럽고
출근길 밟히는 잡풀 하나에도 미안하다.
(구광렬·시인, 1956-)
+ 생일
맛없는 인생을 차려놓은 식탁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윤림·시인, 1958-)
+ 생일
꼼지락꼼지락
3월만 되면
세상에 나갈 준비로
나는 몸이 아프다
60년 가까이 그 모양이다.
(나태주·시인, 1945-)
+ 달력
세상 사람들
생일이 다 들어 있지요.
(박두순·아동문학가)
+ 생일
생일 아침
나 복이 많아서
교탁 위 양은 쟁반 위에
시루떡 김 솟는다
산서면 동화리 신창리 오산리 계월리 봉서리 쌍계리
마하리 백운리 이룡리 건지리 하월리 오성리 학선리
사상리 쌀들, 우리 반에 다 모여
시루떡 되었다
무럭무럭 김이 솟는다
(안도현·시인, 1961-)
+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바로 오늘 태어난
사랑스런 이여!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많은 사람 중에도
당신은 오직 한 사람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봐요
꽃들도 저마다
하나이듯이
한낮의 태양도
하나이듯이
당신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한 사람이란 걸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적인가요
당신은 축복 받아
마땅한 사람!
온 세상을
당신께 드립니다
산과 바다 이 기쁨
모두 당신께 드립니다
(홍수희·시인)
+ 생일을 만들어요. 우리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한 날
첫 꿈을 이룬 날
기도하는 마음으로 희망의 꽃삽을 든 날은
언제나 생일이지요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간 날
절망에서 희망으로 거듭난 날
오해를 이해로 바꾼 날
미움에서 용서로 바꾼 날
눈물 속에서도 다시 한번 사랑을 시작한 날은
언제나 생일이지요
아직 빛이 있는 동안에
우리 더 많은 생일을 만들어요
축하할 일을 많이 만들어요
기쁘게 더 기쁘게
가까이 더 가까이
서로를 바라보고 섬세하게 읽어주는
책이 되어요
마침내는 사랑 안에서
꽃보다 아름다운 선물이 되어요
늘 새로운 시작이 되고
희망이 되어요. 서로에게....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생일 선물
새해 달력에
표를 살짝 해 두었다
지난해 깜박하고 지나친
아내의 생일날에
점 하나를 찍어 놓았다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생각을 굴렸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스쳐가는 엊그제 밤
물끄러미 홈쇼핑 방송을
바라보던 아내의 모습,
그녀가 잠든 사이
손가락을 몰래 재어 보았다
결혼반지 끼워주던 때의
그 곱던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마디 굵은 손가락이 가슴을 친다
그 날이 오면
아침은 내가 지어야지
미역국도 끓여놓고 아내를 깨워야지
그녀가 곤히 잠든 사이
굵어진 손가락에 살며시 끼워준
내 마음 젖지 않도록
(이병훈·시인, 1925-)
+ 생일 선물
아내가 생일 잔치를 후하게 해준다
어제 저녁 밤새 생각한 이벤트라 한다
해묵은 양초들을 꺼내어
심지에 불붙이고
딸년이 잘 먹는 초코파이로 케이크 만들어
깜짝쇼를 한다
남보다 일찍 병들고 시들어 가는 남편이
안타깝고 야속했는지
먼길 떠나는 사람 밥상 차리 듯
제 마음을
저녁 식탁 위에 차려 놓았다
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사 왔을
남방을 선물로 내놓고
내 좋아하는 술도 따라준다
생일 선물이 별거냐는 평소의 나인데
받아보니 마음이 움직인다
드러내 놓을 수 없는 이 야속한 감동
코 박고 사는 일이 때로 시큰할 때도 있다
(조찬용·시인)
+ 39송이의 장미꽃 되어 - 아내의 생일
―아내의 생일
1996년 음력 5월 7일
혹시나 그냥 보낼까 봐
이번에는 잊지 말아야지
몇 번이고 달력을 보면서
미리 붉은 스티커로 표시를 해 두었다
너무나도 그냥 흘러 보낸 14년의 시간이
아쉽고 미안하였기에
퇴근하면서 꽃집에 들러
39송이의 장미꽃을 정성껏 다듬었다
그리고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처음으로 안겨 주는 순간
반갑게 받아 준 아내의 물 젖은 두 손
"15년만에 처음 받아 본다"는 그 한마디에
하루의 피로함이
분산되어 흩어지고
벽에 걸어 두는 한 다발의 사랑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39송이의 장미꽃 되어 피어나고 있었다.
(전병철·시인, 1958-)
+ 생일 케이크
누군가를 마음껏
축하해 주고픈
그런 날이면
하나의 케이크로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생일을 맞이한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그대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나는 케이크가 된다
오늘 하루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생일 케이크가 되어
너에게 가고 싶다
(김병훈·시인)
+ 생일 없는 놈
나 같은 어리석은 놈에겐
생일 잔치가 없었습니다
오십 두 살인데도
단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있기 마련인 잔친데
왜 없었을까요?
간단한 이유입니다
30년 음력 설날에
이놈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설날 준비와
제사 모실 생각에
온 마음이 팔렸었고
나는 나대로
생일 생각은 全無할 수밖에는......
(천상병·시인, 1930-1993)
+ 당신의 생일
오늘 아침에는
그대의 식탁 자리 위에
녹차 한 잔 올려놓았습니다
상긋한 향내음으로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솔솔 피어납니다
케이크에 불붙이고
멍하니 눈만 껌뻑이다
당신의 숨결을 더듬이며
흐느낌으로 돌아앉아야 했습니다
지금쯤 당신은
별들이 많은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의 합창 소리 들으며
꽃길을 거닐고 있겠지요
지상의 내 슬픈 노래는
이렇게 눈꽃이 되어
쌓여만 가는데.
(강민숙·시인, 1962-)
+ 장미꽃 비
이른 아침 내리는 비는
노란 우산을 준비하라는 거구요
오후 네 시에 내리는 비는
다른 약속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사랑하는 사람 외엔
그리고 한밤중에 내리는 비는
일기를 길게 쓰라는 뜻이구요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그칠 때까지 CD를 고르거나
책 구경하라는 배려예요
하지만
그대 생일날 내리는 비는
장미꽃 한아름 안고
그대 창가를 맴돌던
내 눈물방울이랍니다.
(이풀잎·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