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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시 모음> 김경윤의 '신발에 대한 경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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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시 모음> 김경윤의 '신발에 대한 경배' 외

+ 신발에 대한 경배
  
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는 신발장이 나의 제단이다.
탁발승처럼 세상의 곳곳으로 길을 찾아다니느라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이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저 신발들의 행적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
그 제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합장하는
나는 신발의 行者,
신발이 끌고 다닌 그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이다.
나를 가르친 저 낡은 신발들이 바로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이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한평생을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신발들,
그 거룩한 생애를 생각하며 나는
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
(김경윤·시인, 1957-)


+ 헌신짝

구두 밑바닥을 간다
돌부리에 체이고
진 땅, 마른땅을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나를 지탱해주느라
한평생 땅에 코를 박고 지낸
구두 밑바닥

그의 최후가
아무 생각 없이
사납게 뜯겨져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문득
누군가를 위해
저토록 굽이 닳도록
헌신한 적이 있는가를
뉘우치며

버린 구두 밑바닥을 주어
다시 들여다보며
허무에 던져질
내 인생의 끝물을 생각한다.  
(김상현·시인, 1947-)


+ 고무신에는 귀가 있다

정갈스럽게 닦은
낮달 같은 흰 고무신을 신고
길을 걸으면
아주 작은 조약돌 하나가
내게 하는 말도
발바닥으로 전해들을 수 있다.

간혹
돌부리에 채이면
번쩍,
인생은 아픔도 있다는 것을 다시
공부하게 된다.

피 흘림의 가죽구두가 지배하는 21세기를
고무신을 신고 걸어보면
문명이 아닌
잊혀진 흙의 말, 돌의 말, 모래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김상현·시인, 1947-)


+ 신발

언제나 문 앞에서
대기 상태로
천리 먼 길도 주저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는
신실함으로

눌리고 짓밟혀도
낮은 곳을 디디며
돌부리에 걷어차일 때면
찢어지는 고통에도
속으로 삭이며

가시밭길을 걸어
진흙탕을 밟을 때에도
초라한 몰골에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부답으로

뛰고 달리며
닳아 가루가 되어
헌신짝으로 버려지는 날까지
주인만 위해 사는
너는 누구의 후손이냐?
(박인걸·목사 시인)


+ 신발 끈을 묶으며

먼길을 떠나려 할 땐
끈이 있는 신발을 신어야겠습니다.
시간이 좀 더 걸리고
삐걱이는 허리를 굽혀야 하는
불편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졸라맨 발목에서 숨이 콱콱 막히고
굵은 땀방울이 발등을 흐를지라도
거친 들길을 걸을 때에는
험난한 산길을 오를 때에는
끈이 달린 신발을 신어야겠습니다.

어지간한 비틀거림에는 끄덕도 하지 않고
힘에 겨워 넘어지고 쓰러질 때에라도
또다시 발목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그리운 먼길을 걸어갈 때에는
헐거워진 가슴을 단단히 조여 매고
아린 발끝을 꼿꼿이 세워야겠습니다
(이수화·시인, 1939-)


+ 신발

현관에 신발 하나 놓여있다

험한 큰 파도 위로
나를 태우고 돌아다닌
작은 배

바람 속 비 속
이 진흙 바다

그러나 신발 없이도
건너간 이 있어

침묵의 성자가 되어
건네주고 다시 건네주고
사라져 가는 이 있어
다시 보니

지금 누가 내 집에 와 있느냐
네가 산정 위에 머문
구름 같다

나를 세상으로 이끄는
화엄경
(이성선·시인, 1941-2001)


+ 먼길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문정희·시인, 1947-)


+ 神·2
  
나는 매일 신을 신고 저자로 갔네
나의 신은 나의 발에 꼭 맞아 마치 내 몸의 일부인 것 같네
이따금 신은 고약한 냄새를 피우기도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나의 탓
내가 신을 씻기지 않았기 때문이네

어디로 가나요?
신은 내게 한 번도 물은 적 없네
나도 마찬가지.

내가 집안에서 쉴 때 신은 문 밖 댓돌에서 나를 기다리네
그럴 때 신의 속은 어둠으로 가득하네

몇 해 전,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그녀가 묻힌 비탈에서
그녀의 신이
옷가지들과 함께
불구덩이로 던져지는 것을 보았네.

神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네.
(이경림·시인, 1947-)


+ 그리운 나의 신발들

50킬로도 채 안 되는 왜소한 체구를 싣고
꽤나 돌아다녔다, 나의 신발들.
낯선 곳 낯익은 곳, 자갈길 진흙길 가리지 않고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면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하면서도 그것들이 닳고 해지면 나는 주저 않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내다버렸다. 그 덕에
세상 사는 문리를 터득했다 고마워하면서.

이제 와서 내다버린 그 신발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세상사는 문리를 터득한 것은 내가 아니고 그
신발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신발들에 실려 다니기 이전보다
지금 나는 세상이 온통 더 아득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폐기물 처리장을 찾아가 어정거리는 것인데,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내 헌 신발들과 함께
버려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 사는 문리를 터득하고자 나섰던 꿈과 더불어!
(신경림·시인, 1936-)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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