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시 모음> 이응인의 '푸른 우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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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시 모음> 이응인의 '푸른 우주' 외 + 푸른 우주 밥 먹으며 쌀알 하나에 스민 햇살 잘게 씹는다. 콩알 하나에 배인 흙내음 낯익은 발자국, 바람결 되씹는다. 내 속으로 펼쳐지는 푸른 우주를 본다. (이응인·교사 시인, 1962-) + 새벽밥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김승희·시인, 1952-) + 밥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천양희·시인, 1942-) + 밥도 가지가지 논에서는 쌀밥 밭에서는 보리밥 고들고들 고두밥 아슬아슬 고봉밥 이에 물렁 무밥 혀에 찰싹 찰밥 달달 볶아 볶음밥 싹싹 비벼 비빔밥 함께 하면 한솥밥 따돌리면 찬밥 (안도현·시인, 1961-) + 꽃밥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엄재국·시인, 경북 문경 출생) + 밥값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정호승·시인, 1950-) + 밥심 가을 들녘, 추수를 마친 논도 있고 아직 볕을 더 쬐고 있는 벼들도 보인다. 누런 벼들만 봐도 마음은 풍요롭고 햅쌀로 지은 밥을 눈앞에 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햇것이라는 싱싱하고 찰진 느낌에다가 밥심으로 산다는 어른들의 말을 반찬으로 얹어 한술 뜨는 가을이 맛있다. 밥심으로 산다. 그 말을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야 한다. 지금은 굳이 밥이 아니더라도 빵이나 기타 음식으로 배를 채울 것이 많다. 하지만 뱃고래가 든든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밥에 기대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쌀이 어떻게 해서 집까지 오는지 얼마나 많은 땀을 쏟아야 하는지 듣기는 하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잘 모르는 자녀들도 많다. 가을들녘을 지나갈 경우 꼭 한번은 일러주시라. 쌀의 힘, 그리고 밥심에 대해서. (최선옥·시인) + 밥상 산 자(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상 위에 놓이는 수저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는가 아침마다 사람들은 문 밖에서 깨어나 풀잎들에게 맡겨둔 햇볕을 되찾아 오지만 이미 초록이 마셔버린 오전의 햇살을 빼앗을 수 없어 아낙들은 끼니마다 도마 위에 풀뿌리를 자른다 청과(靑果) 시장에 쏟아진 여름이 다발로 묶여와 풋나물 무치는 주부들의 손에서 베어지는 여름 채근(採根)의 저 아름다운 殺生으로 사람들은 오늘도 저녁으로 걸어가고 푸른 시금치 몇 잎으로 싱싱해진 밤을 아이들 이름 불러 처마 아래 눕힌다 아무것도 탓하지 않고 全身을 내려놓은 빗방울처럼 주홍빛 가슴을 지닌 사람에게는 未完이 슬픔이 될 순 없다 산 者들이여, 이 세상 소리 가운데 밥솥에 물 끓는 소리보다 아름다운 것 또 있겠는가 (이기철·시인, 1943-) + 밥 먹자 밥 먹자 이 방에 대고 저 방에 대고 아내가 소리치니 바깥에 어스름이 내렸다 밥 먹자 어머니도 그랬다 밥 먹자, 모든 하루는 끝났지만 밥 먹자, 모든 하루가 시작되었다 밥상에 올릴 배추 무 고추 정구지 남새밭에서 온종일 앉은 걸음으로 풀 매고 들어와서 마당에 대고 뒤란에 대고 저녁밥 먹자 어머니가 소리치니 닭들이 횃대로 올라가고 감나무가 그늘을 끌어들였고 아침밥 먹자 어머니가 소리치니 볕이 처마 아래로 들어오고 연기가 굴뚝을 떠났다 숟가락질하다가 이따금 곁눈질하면 아내가 되어 있는 어머니를 어머니가 되어 있는 아내를 비로소 보게 되는 시간 아들딸이 밥투정을 하고 내가 반찬투정을 해도 아내는 말없이 매매 씹어 먹으니 애늙은 남편이 어린 자식이 되고 어린 자식이 애늙은 남편이 되도록 집안으로 어스름이 스며들었다. (하종오·시인, 1954-) + 식탁의 즐거움 식탁을 보라 죽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그래도 식탁 위에 오른 푸성귀랑 고등어자반은 얼마나 즐거워하는가 남의 입에 들어가기 직전인데도 그들은 생글생글 웃고 있다 한여름 땡볕 아래 밭이랑 똥거름 빨며 파릇했던 파도보다 먼저 물굽이 헤치며 한때 바다의 자식으로 뛰놀던 그들은 데쳐지고 지져지고 튀겨져 식탁에 올라와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펄떡이고 출렁이고 싶다 그들은 죽어서 남의 밥이 되고 싶다 풋고추 몇 개는 식탁에 올라와서도 누가 꽉 깨물 때까지 쉬지 않고 누런 씨앗을 영글고 있다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터지는 식탁의 즐거움 아, 난 누군가의 밥이 되었으면 좋겠네 (정철훈·시인, 1959-) + 밥 초파일, 작은 절집, 공양간 그 어귀에 긴 행렬 늘어섰네, 밥 한 그릇 먹을 행렬, 그러나 밥은 동났네, 이것 참 큰일 났네 목말라 기절한 꽃 조리개로 물을 주면 생기가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지듯이 밥 먹고 못 먹고 따라 그 얼굴이 천양이라 먹으면 부처님도 못 먹으면 중생이니, 부처가 별게 아니라 밥이 바로 부처인데, 그 밥이 한 그릇 없어 부처 되지 못하네 듣자 하니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온 까닭도 식당과 화장실이 동쪽에 있기 때문, 부처-ㄴ들 어쩌겠는가, 동쪽으로 와야지 뭐. (이종문·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