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시 모음> 고은의 '들꽃'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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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시 모음> 고은의 '들꽃' 외
+ 들꽃
들에 가 들꽃 보면 영락없지요
우리 겨레 은은한 품성 영락없지요
들꽃 몇천 가지 다 은은히 단색이지요
망초꽃 이 세상꽃
이것으로 한반도 꾸며놓고 살고지고요
금낭초 앵초꽃
해 질 무렵 원추리꽃
산들바람 가을에는 구절초 피지요
저 멀리 들국화 피어나지요
이런 꽃 피고지고 복이지요
이런 꽃 피고지고 우리 겨레 복이지요
들에 나가 들꽃 보면 영락없지요
(고은·시인, 1933-)
+ 우리 풀
평생, 이름이 없는 풀
이름은 있어도 그 이름 잘 몰라
불러주지 않는 풀, 한참 시든 풀
제 한 몸 가누는데 세월 다 보낸 풀
우리는 그런 풀을 그냥
우리 풀이라 하지
(서상만·시인, 1941-)
+ 개망초
보기 흔한 잡풀이라고
함부로 뽑지 마라
그의 가슴에도
기다림의 씨앗이 묻혀있다
오만을 버리고
질기게 피워 올린
한 톨의 소금 꽃
그도 귀한 손님이다
(김다연·시인)
+ 들꽃
주인 없어 좋아라
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되어라
이름 없어 좋아라
송이송이 피지 않고 무더기로 피어나
넓은 들녘에 지천으로 꽂히니
우리들 이름은 마냥 들꽃이로다
뉘 꽃을 나약하다 하였나
꺾어 보아라 하나를 꺾으면 둘
둘을 꺾으면 셋
셋을 꺾으면 들판이 일어나니
코끝을 간지르는 향기는 없어도
가슴을 파헤치는 광기는 있다
들이 좋아 들에서 사노니
내버려두어라
꽃이라 아니 불린들 어떠랴
주인 없어 좋아라
이름 없어 좋아라
(구광렬·시인, 1956-)
+ 들꽃
1
밤하늘이
별들로 하여
잠들지 않듯이
들에는 더러
들꽃이 피어
허전하지 않네.
2
너의 조용한 숨결로
들이
잔잔하다.
바람이
너의 옷깃을 흔들면
들도
조용히
흔들린다.
3
꺾는 사람의 손에도
향기를 남기고
짓밟는 사람의 발길에도
향기를 남긴다.
(박두순·아동문학가)
+ 풀꽃을 노래함
보십시오
풀꽃이 피었습니다
눈꽃처럼
하얗게 피었습니다
튀밥처럼
서럽게 피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
속곳처럼
이름 모를 풀꽃이
찡하니 피었습니다
아침마다 지나는
무덤 위에도
어디서 그 꽃씨
날아왔는지
풀꽃, 제 먼저
흔들리다간
흔들리는 나를 향해
허리가 아프도록
웃자, 함께 부시도록
웃기로 하자
조그맣게 속삭입니다
언제 많이도 살아냈는지
아아 휘영청, 풀꽃은
벌써 어른입니다
(홍수희·시인)
+ 들풀이 되어라
높은 누마루에서 내려와
맨발로 발레리나처럼
세운 발끝을 땅에 깊이 꽂고
들풀이 되어라
그리하여 땅의 온도와
미세한 울림까지도
예민하게 감지하는
땅을 덮은
들풀이 되어라
들쥐가 지진을 예감하듯
들새가 천둥을 예지하듯
역사의 온갖 징후를
선각하여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선각을 소리 높이
함성 하는
푸르고 싱싱한
들풀이 되거라.
(인병선·민속학자)
+ 풀꽃으로 우리 흔들릴지라도
우리가 오늘 비탈에 서서
바로 가누기 힘들지라도
햇빛과 바람 이 세상맛을
온몸에 듬뿍 묻히고 살기는
저 거목과 마찬가지 아니랴
우리가 오늘 비탈에 서서
낮은 몸끼리 어울릴지라도
기쁨과 슬픔 이 세상 이치를
온 가슴에 골고루 적시며 살기는
저 우뚝한 산과도 무엇이 다르랴
이 우주에 한 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김현숙·시인, 1947-)
+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 있으면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 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 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랴.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 평생 홀로 견딘 그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
(이현주·목사)
+ 들꽃 편지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단다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망설일 필요도 없단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스치는 눈빛을 받기보다는
한 사람의 진솔한 눈빛이
너의 가슴을 채워 줄 것인데
욕심을 더 부린다고
세상이 달라지겠니
그만큼 마음만 무거워지지..
너의 모습 하나만으로
나의 가슴도 채울 수 있으니
그대로 피어 내 마음도 받아주렴
(박우복·시인)
+ 풀꽃
맑은 마음을 풀꽃에 기대면
향기가 트여 올 것 같아
외로운 생각을 그대에게 기대면
이슬이 엉킬 것 같아
마주 앉아 그냥 바라만 본다.
눈 맑은 사람아
마음 맑은 사람아
여기 풀꽃밭에 앉아
한나절이라도 아무 말 말고
풀꽃을 들여다보자.
우리 사랑스런 땅의 숨소릴 듣고
애인같이 작고 부드러운
저 풀꽃의 얼굴 표정
고운 눈시울을 들여다보자.
우리 가슴을 저 영혼의 눈썹에
밟히어 보자.
기뻐서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이네.
풀꽃아
너의 곁에 오랜 맨발로 살련다.
너의 맑은 얼굴에 볼 비비며
바람에 흔들리며
이 들을 지키련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풀꽃과 더불어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거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구상·시인, 1919-2004)
+ 들꽃처럼
들을 걸으며
무심코 지나치는 들꽃처럼
삼삼히 살아갈 수는 없을까
너와 내가 서로 같이
사랑하던 것들도
미워하던 것들도
작게 피어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삼삼히 흔들릴 수는 없을까
눈에 보이는 거 지나가면 그 뿐
정들었던 사람아
헤어짐을 아파하지 말자
들꽃처럼
들꽃처럼
실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삼삼히 그저 삼삼히
(조병화·시인, 1921-2003)
+ 들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들꽃을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옭아매던 것들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다
숲 향기를 온몸에 받으며
들꽃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맑아졌다는 것이다
늘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얽매이게 되는 것들을
훌훌 털어내는 것이다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는 순간
생각하는 것들이 바뀌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들꽃을 바라보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들꽃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고
온몸을 다하여 피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힘이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엉겅퀴의 노래
들꽃이거든 엉겅퀴이리라
꽃 핀 내 가슴 들여다보라
수없이 밟히고 베인 자리마다
돋은 가시를 보리라
하나의 꽃이 사랑이기까지
하나의 사랑이 꽃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잃고 또
떠나야 하는지
이제는
들꽃이거든 가시 돋힌 엉겅퀴이리라
사랑이거든 가시 돋힌 들꽃이리라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함부로 꺾으려드는 손길에
선연한 핏멍울을 보여주리라
그렇지 않고 어찌 사랑한다 할 수 있으리
그리고
보랏빛 꽃을 보여주리라
사랑을 보여주리라 마침내는
꽃도 잎도 져버린 겨울날
누군가 또 잃고 떠나
앓는 가슴 있거든
그의 끓는 약탕관에 스몄다가
그 가슴 속 보랏빛 꽃으로 맺히리라
(복효근·시인, 1962-)
+ 들꽃의 노래
유명한 이름은
갖지 못하여도 좋으리
세상의 한 작은 모퉁이
이름 없는 꽃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몰라봐도 서운치 않으리
해맑은 영혼을 가진
오직 한 사람의
순수한 눈빛 하나만
와 닿으면 행복하리
경탄을 자아낼 만한
화려한 꽃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소박한 꽃과 향기로
살며시 피고 지면 그뿐
장미나 목련의 우아한 자태는
나의 몫이 아닌 것을
무명(無名)한
나의 꽃, 나의 존재를
아름다운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리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